수필은 산문의 문학임을 또 하나의 특징으로 한다. 즉 산문정신이 유독 강한 글임을 전제한다. 소설과 희곡이 다듬어진 글이라면, 수필은 구태여 언어적 연금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글이다. 조잡한 채 그대로를 드러낸 산문이라는 데 나름의 특징이 있고, 그것대로 멋과 맛을 주는 산문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여느 장르와 달리 수필이야말로 근대문학의 산문정신에 입각한, 자기 생활을 계획적인 의도 없이 사실대로 드러낸 글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산문이란 근대 산업혁명 이후에 와서야 발달된 글이다. 그것은 운문과는 달리 일정한 규율에 따르는 문장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규율을 무시하는 글이다. 산문의 언어는 어디까지나 대상을 의미하고 대상을 그리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산문이란 언어의 의미를 통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산문에 있어서의 아름다움은 배후에 숨어, 무엇을 쓸 것인가가 어떻게 쓸 것인가에 선행한다. 또한 언어와 그 의미하는 것, 그리는 대상과의 사이에는 1대 1의 대응관계가 성립한다. 이런 의미에서 산문의 언어는 과학용어나 일상용어에 가까운, 대상을 지시하는 부호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부호가 아니라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작가의 주체적인 의미가 깃들인 것이라는 데서 그것들과는 다른 것이다. 또한 산문은 시와는 달리 의미 중심의 글이고, 논리적이요 객관적이며 사실적 과학정신에 바탕을 둔 문장이다. 그러면서 현실적이며 자기 생활에서 우러나온 글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산문의 본질이라 할 때 수필은 이와 같은 산문정신을 근간으로 한다. 그 글은 동시에 소설이나 희곡에서처럼 의도적이요 조직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들보다는 소재를 자기 생각에 나타나는 그대로 표현하는 산문이다. 곧 자기 생활에 젖어 있는 마음을 산문으로 구성하는 글이라 할 것이다.
얼마 전에 모자를 다리러 모자상에 들렀다. 날씨 탓으로 모자가 구겨졌고, 또 가능하면 모자가 새롭고 빛나 보이게 하고 싶은 까닭이 있었다. 그래서 기다리면서 세탁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자니까 모자상은 정말로 그에게 흥미 있는 문제에 관해 내게 말을 했다. 즉 모자와 머리에 관한 문제다.
"예"
하고 그는 내가 한 어떤 말에 대답하여 이렇게 말한다.
"머리의 생김생김과 크기에는 놀라운 차이가 있음네다. 자, 손님의 머리는 그저 평범한 머리라고 할 수 있습죠. 제 말씀은 ......."
하고 그는 내 평범한 얼굴에 떠도는 실망의 그림자를 분명히 보고 이렇게 말을 보탠다.
"제 말씀은 손님의 머리는 특수하다고 말씀할 것은 아니라는 것입네다. 그런데, 이런 머리들이 있습죠 - 자, 저기 있는 저 모자 좀 보세요. 그것은 놀랍게도 괴상하게 생긴 길고 좁고 울통불통 흑투성이 머리의 신사 것입네다. 괴상망칙하기도 하죠. 그 분의 머리야말로 또 칫수로 말 하면 차이가 심한 데 놀랍죠. 저는 변호사들과 거래를 많이 합네다. 그런데 그 분네들 머리가 그처럼 커지게 된 것은 많은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인 것 같습네다. 자, 저기 저 모자는 某씨의 것입네다(유명한 변호사의 이름을 말한다). 그 분의 머리는 굉장히 큰뎁죠 - 7인치 반 - 이게 그 분의 칫수입죠. 그런데 7인치를 넘는 머리가 많이 많이 있습네다."
"이렇게 생각이 됩네다."
하고 그는 말을 계속한다.
"머리는 칫수는 직업에 따르는 것 같습네다. 자, 저는요, 항구 읍에 늘 있었습죠. 그래서 배의 선장들의 일을 많이 보았습네다. 그 분네 머리는 괴상망칙한 머리들입네다. 아마도 선장들은 조수며 풍세 . 빙산 따위를 생각하기에 걱정 근심이 많기 때문인 것 같습네다."
나는 내 평범한 머리를 가지고 상점을 나오며 모자상에게 형편없는 인상을 주었다는 사실을 의식하였다. 모자상에게 나는 6인치 8분의 7 사이즈밖에 되지 않았으니 나는 대수롭지 않은 인간이 되었다. 보배 같은 머리란 반드시 큰 머리가 아니라고 그에게 지적해 주고 싶었다. 물론 위대한 인물이 종종 머리가 큰 것은 사실이다. 비스마르크의 칫수는 7인치 4분의 1이었다. 글래드스톤의 칫수도 그러했다. 또 캠벨배너맨도 그러했다.
그러나 반면에 바이런의 머리는 작았고 따라서 그 뇌도 아주 작았다. 그런데 바이런은 셰익스피어 이후에 유럽에서 태어난 가장 뛰어난 두뇌의 주인공이라고 괴테는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일반적인 경우에는 동의하지 않겠고, 작은 머리를 가진 사람으로서 이와 관련해 이 문제에 대하여서는 괴테의 말을 믿을 각오가 되어 있다.
가드너, <모자철학>
이 글의 소재는 말 그대로 단순한 모자이다. 그러나 그 단순한 소재는 작자의 생활의 통찰과 체험에 의한 사고작용을 거쳐 모자의 철학성을 꿰뚫는 심안을 산문적 표현으로 재구성시키고 있다. 즉 모자에 관한 작자 나름의 철학관을 수필화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자를 통한 인생 해석이요, 이해이다.
또한 이 수필에서 흥미롭게 주시되어지는 것은 모자상이 모자를 통해 예리하게 파헤치는 그 직업의식이다. 직업의식이란 자기 전문직업에 종사함에 흔히 있을 수 있는 특유한 의식이다. 다시 말해 자기의 직업에서 굳혀진 그 나름대로의 사고방식이라 할 수도 있다. 사람에겐 자기 몸에 밴 습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곧 직업의식인 셈이다.
이 수필에서 맛볼 수 있는 것도 그 직업의식이다. 모자상에겐 모자를 통한 모자상만이 갖는 나름의 직업의식의 발동이 있다. 전문화된 의식세계는 그 사고로 하여 사물을 꿰뚫어 보게 하는 일종의 타성적 안목을 갖게 하기까지 한다. 여기서의 모자상은 모자를 통해 사람의 머리를 꿰뚫어 보는 그 안목을 가진 사람으로서 모자에 투영되는 인간의 심리를 해독한다. 그것은 전문화된 직업의식으로 읽는 인간 해석이요 이해이다. 그것을 산문성에 입각, 수필적 재구성으로 수필화한 것이다. 이처럼 산문형식은 수필에서 뗄 수 없는 그릇이기도 하다. 그 그릇은 산문정신에 근간을 둔 그릇이어야 한다. 즉 실제적 현실성에서 우러나온 산문이어야 한다는 말인 바 바로 그것이 산문정신에 투철한 작업이 되기도 한다. 허버트 리드는 "시는 창조적 표현이고 산문은 구성적 표현이다"고 전제하되 "산문은 축적된 언어의 분산 활동"이라고 그의 『영국산문론』에서 말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 허버트 리드는 시와 산문을 응축과 분산활동으로 구분한다. 즉 시는 응축의 과정에서 발생하고, 산문은 분산의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시가 창조적인 표현에의 산물이라면, 산문은 구성적인 표현에의 산물로, 여기서 말한 '구성적'이란 곧 기성의 소재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소재의 재구성에 따른 기성의 언어에 의한 건축물이기도 하다. 이때의 건축물이란 바로 수필을 뜻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수필이 기성의 언어에 의한 산문문학임을 강조한 것이 된다. 그래서 기성의 언어에 의한 산문은 응축활동의 소산이라 할 수 있는 시보다 훨씬 현실적이며 생활 속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인지하게 된다.
이상에서 수필은 산문으로 씌어지되 산문정신에 투철한 산문문학의 대표적인 양식임을 보게 된다. 더러 수필 속에 운문이 삽입된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산문문학의 입장에서 시를 차용했을 뿐 다른 의도는 없다. 그 점에서 산문은 수필의 형식을 벗어날 수 없고, 수필양식을 그 기반으로 삼는다. 그러나 같은 산문이라 할 지라도 소설 . 희곡과는 그 성질을 달리한다. 앞서 허버트 리드가 말한 바와 같이 소설은 단순한 기성의 언어에 의한 건축물이 아니라 탁마되고 구성적인 서술로 이루어진 문학적 표현이다. 이에 반해 수필은 있는 그대로의 기성 언어의 구성으로 이루어진다. 이에 소설과 희곡이 의도적 . 조직적 서술이라면 수필은 소재를 생각나는 그대로 표현하는, 이른바 씌어진 내용이 결과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산문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에 수필이 소설과 희곡과 또 다른 성격을 갖는 특성이 있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