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고개신사 2011. 1. 25. 08:44

[평론] 피천득의 수필과 수필 기준

 

 

                                                                                                                                                  이의양



수필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넓은 의미로는 붓 가는대로 쓰는 것이라 하지만 작가에 따라 그 개념이 가지를 치면서 정의가 다양해진다. 이에 정작 수필가로 등단한 신인들이 수필이 무엇인가를 묻기도 한다. 문학은 형식의 미학이며 형식의 창조이기도 하다. 그런데 붓 가는대로 쓴다는 자체를 형식으로 놓고 본다면 좀 막연하다. 이는 제멋대로 마구 쓰라는 뜻과는 뭔가 좀 다를 것이다. 현재의 일반적 견해에 의하면 수필문학의 원조를 삼권분립론으로 유명한 17세기 프랑스의 정치학자 몽테스큐로 삼는다. 또한 수필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에세이는 논문에 가까운 글이고 미셀러니는 작가의 신변잡사를 다룬 글이라 하여 다 수필의 범주에 넣어 중수필과 경수필로 나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서구문학의 관점에서다. 중후한 철학이나 과학논문이 곧 수필로 통하는 것도 아니요, 작가 개인사의 기록이나 생활보고서와 같은 글이 수필이 아닌 것도 아니다. 양자간의 어떤 글이든지 문학으로서의 진가를 발휘하려면 문학이라는 용광로를 거쳐야 한다. 즉 문학적 승화작용과 미학이라는 제련과정이다.

문학의 정의로부터 과연 그 승화와 미학이 어떤 것인가도 작가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문학이라는 고유한 영역의 존재가 분명한 이상 그 어떤 공통분모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우리 수필문학의 거두인 피천득 작가의 <수필>과 <인연>이라는 두 작품을 텍스트로 삼아 분석해 보고, 오늘의 수필문학에 가장 가까운 고래 동양문학인 부(賦)에 속하는, 중국 송나라의 대문장가 구양수(九陽修)의 작품 <추성부, 秋聲賦>를 이에 대비시켜 보기로 한다.


피천득 작가의 작품 <수필>은 개인적인 창작체험을 통하여 얻은 수필에 대한 정의와 그 미학을 논한 에세이에 속한다. 그리고 <인연>은 작가가 어렸을 때 만났던 아사코라는 여인과 자기와의 오랜 인연을 회고하며 아름답게 써내려간 미셀러니에 속한다. 그런데 <수필>이라는 작품은 국정교과서에 올라 마치 이것이 수필의 전부인 양 우리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점에서 피천득의 <수필>은 제목상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실 이 작품은 피천득 작가 개인의 수필론에 불과하고 더 정확히 말하면 그만의 수필의 미학일 뿐이다. 그리고 자세히 검토하면 수필을 설명하면서도 아무것도 설명치 못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피천득 작가 <수필>의 서두인 이 부분은 다른 작가들이 수필을 설명할 때에 많이 인용한다. 그럴듯하게 보이는 이 문장은 수필의 미학과 예리함을 함축시킨 장점도 있지만, 그에 치중한 결과 수필의 범위를 지나치게 축소해버린 오류도 범하고 있다. 꼭 수필이 청자연적이어만 하고 난이어만 하고 학이어야만 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어야만 하는가? 그 반대의 사유도 얼마쯤이라도 가능하다. 만약에 “수필은 뒤꼍의 장독이다. 수필은 호박잎이요, 참새요, 허리통 굵은 여인이다.”라고 말한다면 틀렸을까?

필자의 시각으로는 이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에도 피천득 작가 특유의 과장된 낭만과 미학이 존재한다. 이는 작가의 문학이 탐미주의로 기울어진 결과로 보여 진다. 수필 중에서 미셀러니에 속하는 이 작품에서도 우연이기에는 너무나도 우연일 수밖에 없는 작가의 과장된 낭만과 미학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인연>에서 작가는 열일곱 살 때에 아사코를 처음 만났다. 여기에서는 스위피트라는 꽃이 등장한다. 십여 년 후에 아사꼬를 만났을 때는 성장한 처녀의 모습에 걸맞는 목련꽃이 등장하고, 또 다시 십여 년 후에 아사꼬를 찾아 갔을 때 그녀는 결혼한 후였고 이에 시들어가는 백합꽃이 등장한다. 아사꼬의 변화에 따라 적절한 꽃이 어쩌면 그렇게 정확히도 등장했는지는 모르지만 약간의 픽션과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또 처음에 만났을 때 아사꼬는 하얀 수건과 반지를 작가에게 주었고, 작가는 안데르센 동화집을 아사꼬에게 선물했다. 두 번째의 만남에서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이야기하고 연두색 우산이 등장하고 이에 작가는 <셀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특히 좋아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에서 작가는 처음 만났을 때 주었던 안데르센 동화집의 겉표지에 그려져 있던 뾰족 지붕 아래의 뾰족 창문의 작은 집에서 아사꼬가 살고 있었다고 했다. 이 모든 낭만적인 소재가 과연 현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낭만과 낭만의 연속적인 만남이라는 이런 우연도 흔치 않아 너무나도 아름다운 인생인 것이다. 다시 위의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수필은 청자연적이요, 학이요, 난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라는 수필의 정의를 내린 후 곧바로 작가는 난데없는 자가당착적 이미지에 빠진다.


수필은 청춘의 글이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청자연적과 학과 난과 날렵한 여인의 이미지는 정제되고 예리한 지성의 절정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수필은 추호의 틈도 없이 절제된 세련의 극치를 달려야만 할 것 같다. 그런데 작가는 이렇게 시작한 수필의 정의를 별안간 무너뜨려, 수필은 중년을 넘어선 사람의 글이고, 정열과 심오한 지성도 내포한 문학도 아닌,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수필이 어떻게 청자연적, 학, 난, 날렵한 여인이 된다는 말인가? 더구나 수필가가 단순하게 내갈긴 글이라면 말이다. 수필가라는 자격 하나만으로 청자연적, 학, 난, 날렵한 여인이 될 리는 없다. 무엇보다 작가는 앞에서 사용한 이미지를 뒤까지 연결시키지 못한 치명적 실수를 범하고 있다. 청자연적은 푸른 청춘의 상징이요, 학은 고고함의 상징이며, 난은 예리한 지성의 상징이고, 날렵한 여인은 완숙한 세련미의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청춘도 아니요, 세파에 시달린 중년을 넘어선 사람이요, 정열도 없고 지성도 없으며, 그저 단순한 글이라는 것이다.


사실 피천득 작가의 <수필>처럼 난해한 글은 없다. 이 작품에는 동원될 수 있는 온갖 미사여구가 등장하여 독자를 혼란과 혼탁에 빠지게 한다. 수필이 그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절대로 “단순한 글”이 될 수가 없고, 또한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고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수필은 소설처럼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열도 지성도 없이 가고 싶은 대로 가며 단순하게 쓴 글이 과연 작가 스스로가 요구하는 아래와 같은 수필이 될 수가 있을까?


수필은 흥미는 주지만은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縕雅優美)하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면서도 산만하지도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사실 위와 같은 조건을 구비한 글을 보고 “단순한 글”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글로서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가 없는 글이다. 위의 문장은 마치 경전에서나 나옴직한 중용의 덕을 말하고 있다. 혹시 작가는 동양 전래 중용의 덕을 수필의 미학으로 끌어와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아전인수(我田引水)의 무리를 범했다는 판단이고, 심하게 말하면 미사여구에 빠져서 작가는 정작 수필을 설명하면서도 아무 것도 확연하게 설명치 못한다는 결론이다.

수필은 일상의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가 작가가 지닌 지식, 경륜, 인생관, 철학과 섞여 문학적 승화작용을 하고 미학적 통로를 거쳐 제련되어 나오면 훌륭한 수필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제련과정을 피천득 작가가 말했을 수도 있는데 너무 현란하고 애매모호하게 표현하여 수필기준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한 감이 있다. 수필은 아주 깨끗하여 청자연적이 될 수도 있거나 고매하기 이루 말할 수 없기에 학이 되거나 지성의 예리함으로써 난이 되거나 날렵한 여인처럼 세련될 수도 있겠으나, 아주 소박하여 장독이 될 수도 있고 세속적인 분주함으로 참새가 될 수도 있고 펑퍼짐한 여유로 호박잎이 될 수도 있고 허리통 굵고 마음씨 좋은 아낙네도 될 수가 있다. 이는 수필가들에게 길이 따로 없다는 부담을 가져다 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제멋대로의 길일 수록 또한 길이 많을수록 더욱 제 수필기준을 명확히 잡아야 할 것이다.


중국 한나라 때부터 발달된 문체 부(賦)는 운문과 산문의 중간체로써 일정한 사물이나 대상을 객관적이고 미학적으로 묘사했다. 조굴원부, 아방궁부, 적벽부 등이 유명한데 여기서는 현재 우리의 수필과 가장 가깝다고 느껴지는 중국 송나라 시대의 대문장가 구양순의 추성부(秋聲賦)부를 소개한다. 원문에 따르면 시를 능가하는 수려한 문장이지만 번역된 한글로 옮기기에 그 진수를 다 맛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백발이 성성한 자신의 늙음을 가을소리에 접어 넣는 적절한 구도와 은유적 기법, 그리고 미문(美文)을 유감없이 구사한다.


추성부(秋聲賦) / 구양수


구양자, 바야흐로 밤이라 책을 읽는데, 소리가 서남으로부터 들려오는지라 놀란 듯이 그 소리를 듣고 말했다.

“이상도 하구나! 처음에는 비 오는 소리 같더니 음산한 바람 소리 같이 들리고, 문득 기운차게 뛰어 올라 물결 부딪치는 소리로다. 마치 파도가 밤에 놀라며 비바람이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듯하니 그것이 물건에 닿으매 칼소리며 무딘 쇠붙이 맞부딪치는 소리를 하여 금과 철이 다 운다. 또 마치 적을 향하는 병사가 재갈을 물고 질주하는 것과 같아서 호령도 들리지 아니하고 다만 사람과 말의 소리만 들린다.”

내 동자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소린가? 너 나가서 이를 보고 오너라.” 하였다.

동자가 대답했다.

“별과 달은 희고 맑으며 은하수는 하늘에 걸렸는데, 사방에 사람소리 하나 없고 소리는 나뭇가지 사이에 있습니다.”

나는 말했다.

“아, 슬프도다! 이것이 가을소리로다. 어찌하여 왔는가?”

대개 저 가을의 모양, 그 빛은 참담하여 안개 흩어지고, 구름 걷히며, 그 모양은 맑고도 밝아 하늘 높고 햇빛 투명하여, 그 기운은 무섭도록 차가워서 사람의 살과 뼈를 찌르는 듯하며, 그 마음은 몹시 쓸쓸하여 산천이 적적하고 고요하다. 그러므로 그 소리 몹시 구슬프고 절박하며 부르짖듯 세차게 일어난다. 풍성한 풀은 짙은 녹색으로 꽃그림 놓으며 다투어 무성하고, 아름다운 나무 시퍼렇게 무성하여 기뻐할 만하더니, 풀은 가을소리에 떨리어 빛이 변하고 나무도 이것을 만나서 잎이 떨어지니, 그 꺾여 시들고 영락하는 까닭은 곧 하나의 기운이 너무 매운 때문인 것이다.

대저 가을은 형관(刑官)이요, 시절에 있어서는 음기(陰氣)이다. 또 살생을 일삼는 무기의 모습이라, 오행(五行)에 있어서는 차고 단단한 금(金)이 되니, 이것을 천지의 의기(義氣)라고 한다. 항상 쌀쌀하게 말려 죽이는 것으로써 마음을 삼는다. 하늘이 만물에 있어서, 봄에는 생장하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그것이 음악에 있어서는 상성(商聲)이 서쪽의 음악을 주관하고, 이칙(夷則)은 칠월의 음률이 되니, 상(商)은 다칠 상(傷)이라, 만물이 이미 늙어서 슬퍼하고 상심하는 것이다. 이(夷)는 살육이라, 만물이 한창 때를 지나면 마땅히 죽게 되는 것이다.

슬프다!

초목은 감정이 없는 것이긴 하나 때에 있어서 나부끼어 떨어진다. 사람은 움직이는 물건이 되어 오직 만물의 영장인지라 백 가지 근심이 그 마음을 감동시키며, 만 가지 일이 그 몸을 수고롭혀서 마음속에 움직이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 정의(情意)을 옮긴다. 그런데 하물며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바를 생각하고, 그 지혜로 능치 못하는 바를 근심함에랴! 그 윤택이 흐르듯 붉은 것이 고목이 되고, 그 칠흑 같이 검은 것이 백발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찌 하여 쇠와 돌의 바탕도 아닌데 초목과 더불어 번영함을 다투고자 하는고! 생각건대 누가 이것을 손상케 하든 또한 어찌 가을소리를 두고 한탄하겠는가?

동자는 대답도 아니 하고 머리를 떨군 채 졸고 다만 들리느니 사방 벽에서 벌레소리만 칙칙 나의 탄식소리 더해주는 듯하도다.

 

- 이의양 (소설가,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