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일어나, 서른 즈음에..
김광석의 노래 4곡과 악보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텅빈 방문을 닫은 채로
아직도 남아 있는 너의 향기
내 텅빈 방안에 가득 한데
이렇게 홀로 누워 천정을 보니
눈앞에 글썽이는 너의 모습
잊으려 돌아 누운 내 눈가에
말없이 흐르는 이슬방울들
지나간 시간은 추억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긴 밤을
또 잊지 못해 새울까
창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보다 커진 내방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
저마다 아름답지만
내 맘속에 빛나는 별 하나
오직 너만있을 뿐이야
창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보다 커진 내방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서른 즈음에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연기 처-럼
작기만한 내기억 속엔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가슴 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 인줄 알았는 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거리에서
거리에 가로등불이 하나 둘씩 켜지고
검붉은 노을 너머 또 하루가 저물 땐
왠지 모든 것이 꿈결 같아요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무얼 찾고 있는지
뭐라 말하려 해도 기억하려 하여도
허한 눈길만이 되돌아와요
그리운 그대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업던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그곳으로 떠나 버린 후
사랑의 슬픈 추억은 소리 없이 흩어져
이젠 그대 모습도 함께 나눈 사랑도
더딘 시간 속에 잊혀져 가요
거리에 짙은 어둠이 낙엽처럼 쌓이고
차가운 바람만이 나의 곁을 스치면
왠지 모든 것이 꿈결 같아요
옷깃을 세워 걸으며 웃음 지려 하여도
떠나가던 그대의 모습 보일 것 같아
다시 돌아 보며 눈물 흘려요
그리운 그대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업던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그곳으로 떠나 버린 후
사랑의 슬픈 추억은 소리 없이 흩어져
이젠 그대 모습도 함께 나눈 사랑도
더딘 시간 속에 잊혀져 가요
일어나
검은밤의 가운데 서 있어 한치앞도 보이질 않아
어디로 가야하나 어디에 있을까 둘러봐도 소용없었지
인생이란 강물위를 뜻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 가겠지
일어나 일어나 다시한번 해보는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끝이없는 말들속에 나와 너는 지쳐가고
또다른 행동으로또다른 말들로 스스로를 안심시키지
인정함이 많을수록 새로움은 점점 더 멀어지고
그저 왔다갔다 시계추와 같이 매일매일 흔들리겠지
일어나 일어나 다시한번 해보는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가볍게 산다는건 결국은 스스로를 얽어매고
세상이 외면해도 나는 어차피 살아살아 있는걸
아름다운 꽃일수록 빨리 시들어가고
햇살이 비치면 투명하던 이슬도 한순간에 말라버리지
일어나 일어나 다시한번 해보는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일어나 일어나 다시한번 해보는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목을 매 숨진 지 15년이 되었다.
그 동안에도 사람들은 실연한 뒤 ‘사랑했지만’을 떠올리고 ‘서른 즈음에’로 떠난 청춘을 아쉬워했으며
‘일어나’에서 위안을 얻었다. 124만260차례.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태진미디어 노래방기기로 그의 노래가
불려진 횟수다. 하회탈 같은 미소와 낭랑하며 구슬픈 목소리…. 그의 이미지는 한번쯤은 누구나 가졌던,
살아가며 읽어버린, 그러나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맑은(혹은 맑았던) 젊은날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소극장―광장과 밀실 사이
‘노래를 찾는 사람들’ 등 이른바 민중가요 노래패와 그룹 ‘동물원’을 거쳐 김광석이 솔로 앨범들을 내놓았던
1990년대 초반은 문화적 전환점이었다. 새로운 흐름을 내건 가요들은 군중 속의 외로움, 흔들리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토해냈다. 시선은 개인의 내부로 향했다. ‘넥스트’의 ‘외로움의 거리’, ‘서태지와 아이들’의
‘수시아’ 등에도 이런 자취는 또렷하다.(이영미 <한국대중가요사>) 광장은 해체되고 밀실의 고독은 깊어갔다.
김광석은 개인과 우리의 고민을 아울러 노래했다. 이별의 고통, 세상 앞에 나약한 자아에 대한 연민 등을
절절한 목소리에 담았다. 서정민갑 민족음악협회 간사는 “386세대에게 민중가요가 채워주지 못한 개인적인
위안과 공감을 줬다”고 말했다. 3집(1992년)과 4집(1994년), 그리고 한대수의 ‘바람과 나’, 김현성의
‘이등병의 편지’, 양병집의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까지 끌어모은 <다시부르기1·2>(1993·1995년)에서 그는
우리의 문제로 시선을 다시 돌린다. 대중음악평론가 박준흠은 “80년대 우리의 정서와 90년대 개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김광석의 노래엔 모두 있다”고 말했다. 이런 노래들을 김광석은 1000차례에 걸쳐 서울 동숭동 소극장
공연에서 풀어놨다. 공동체에 대한 향수와 개별성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절충적인 그곳에서
사람들은 그와 소통했다.
통기타―향수와 머뭇거림
그는 한대수, 김민기 등 이른바 비판적 포크의 맥을 이으면서도 대중적 지지를 받은 마지막 계승자로 꼽힌다.
그의 3집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와 같은 시기에 발매됐다. 이어 듀스 등 댄스그룹과 넥스트 등
록밴드가 기세를 펴며 문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는 “대중음악의 문법이 획기적으로
바뀌는 시점에서 김광석은 이전의 문법을 지탱해준 인물”이라며 “전면적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김광석의
노래로 덜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비판적 포크의 고갱이는 낭만보다는 사실성이다. ‘이등병의 편지’는
군대로 떠나는 청춘들의 이야기였고,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도 삶을 지탱하느라 허리가 휘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것이었다. 사랑 노래 속 화자들은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그날들’)라며
떠나보내지도 잡지도 못하는 나약한 개인이다. 변화를 적극적으로 따라가지도, 그렇다고 저항하지도 못하며
수동적으로 관조할 수밖에 없는 인물의 사실적인 모습은 오히려 보통 사람들의 공감거리가 됐다.
30살―청춘의 소멸과 남은 희망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서른 즈음에’) ‘회귀’ 등 그가 부른 노래에는 빛나던
청춘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이 아로새겨져 있다. 희망과 의지에 대한 확신은 주름이 늘어나면서 자취를
감춰간다. 이는 386세대의 후일담 정서와 맞닿아있다. 임진모는 “민주화 투쟁을 했던 세대의 고단함, 세상을
보는 실망감이 김광석 노래에 전반적으로 퍼져있다”고 평가했다. 사실 초라한 자아에 대한 절망감은 그만의
것은 아니다. 이영미는 <한국대중가요사>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1990년대 신세대들은 자신도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노래에서 순수의 표징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른 점은
김광석의 노래엔 ‘열정의 시대’를 향한 동경과 차마 버리지 못하는 희망이 내비친다는 것이다.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가겠지”라면서도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일어나’)라고 부추긴다.
그의 노래는 한번쯤은 삶에 지칠, 그래도 쉽사리 포기 못할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래서 그는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형이고 친구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제이에스에이>(2000년)에서 오경휘 인민군 중사(송강호)
는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대니”라며 술잔을 기울였다. 가수 박학기, 김건모 등이 참여한
<김광석 앤솔로지1>(2001년) 등 헌정 앨범들이 줄줄이 나왔고, 최근엔 10주기를 맞아 대표곡을 추려 담은
<김광석 베스트>가 발매됐다. 그의 노래들로 꾸미는 뮤지컬 ‘나의 노래’(가제)가 기획되고 있으며 내년
1월말께는 위성디지털방송 오디오 채널44에서 미공개 라이브 음원을 방송할 예정이다. 그리고 그의 가장
큰 팬클럽인 ‘둥근소리’는 매년 그래왔던 것처럼 내년 2월에도 공연을 열고 그를 추억한다.
김소민 기자(한겨레)
64년 1월 22일, 대구 대봉동에서 형 둘과 누나 둘 아래 막내로 태어나며, 68년 서울로 올라와 창신동에 살며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다. 76년 경의 중학교에 입학하여 현악반에 들어간 그는 그때부터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 등의 다양한 악기를 배우며 악보 보는 법을 익히며, 79년 대광고등학교 입학하여서는 합창단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82년 명지대 경영학과에 입학하게 되고, 1학년때 대학연합동아리 ’연합메아리’에 가입하여 기타를 튕기며
이런저런 노래를 하고 있을 무렵, 한 친구에게서 "젊은 예수"라는 운동권 가요집을 선물받게 되는데, 그 안에
있던 ’못생긴 얼굴’을 부르다가 그만 남자답지 못하게 울어버리기도 한다. 84년 김민기씨의 ’개똥이’ 음반에
참여하며 이때 만난 몇몇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을 만든다. 85년 1월 군에 입대하여,
군 생활 중 사망한 큰 형으로 인해 6개월을 복무하고 그해 7월 제대한다. 군을 마치고 복학하여, 무얼할까
하던 그는 ’못생긴 얼굴’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사는것도 괜찮겠다 싶어, 노래의 길을 택한다.
87년 여름 노래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모여 별 생각없이 녹음한 것을, ’산울림’의 김창완씨가 듣고 음반을
내자고 하여 ’동물원 1집’을 내 놓는다. "이걸 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일거다"라며 농담같은 진담을 했었는데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동물원"앨범은 많이 팔렸다. 그들은 많이 팔린 이유가 그들의 노래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후, 자신의 음악을 찾고 싶었던 그는 동물원 친구들과 헤어져 89년,
’기다려줘’, ’너에게’를 담은 1집을 내놓으며 홀로 열심히 뛰고 또 뛴다. 그런 힘든 중에도, 노래만큼 사랑도
포기 못한다며 1년의 열애 끝에 90년에는 달콤한 가정을 꾸민다. 91년 ’사랑했지만’이 담긴 2집을 내고,
92년 ’나의 노래’가 담긴 3집을 내며, 이젠 정말 노래의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는다. 93년에는 ’거리에서’의
세계와 ’광야에서’ 모두 녹아있는 ’다시부르기 1집’이 나오며, 94년에 발표된 ’서른 즈음에’와 ’일어나’가 담긴
4집에서는 좀 더 명확해진 노래의 길을 보여준다.
95년에는 모던포크의 계보학을 정리한 ’다시부르기 2집’이 발표된다. 매해 음반을 발표하면서도, 관객과의
호흡을 좋아했던 그는 소극장 공연을 성실하게 가져왔고, 95년 8월에는 학전 소극장에서 1천회 기념 공연을
갖기도 한다. 96년 1월 6일 맑은 웃음과 노래만을 많은이의 가슴에 심어놓고 훌쩍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 ’노래여행’ 홈페이지에서 발췌
너를 잊기 위해 그의 목소리를 빌린 밤이 있었다. 그는 나지막하게 잊으려 돌아누운 나를 위로했다.
잊어야 한다고. 그의 위로가 없었다면, 우리는 불면의 밤을 통과했을까.
그가 그리워 그의 목소리를 빌린 밤도 있었다. 나지막한 노래는 자신에게 보내는 만가로 들렸다. 홀로
누워 천장을 보니 글썽이는 모습이 보였다. 글썽이는 것이 그인지, 나인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되뇌었지만, 어제보다 커진 그리움만 남았다. 긴긴 밤을 잊지 못해 새웠다. 그리고 남은 노래를 따라 불러
본다.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 저마다 아름답지만 내 마음속에 빛나는 별 하나 오직 너만 있을 뿐이야..”
10년이 더 지나면, 그를 지울 수 있을까. 김/광/석
2005년 12월16일(음력 11월15일) 서울 창천동 안양암에서는 고 김광석씨를 추모하는 10번째 기제가 쓸쓸하게
열렸다. 형 김광복씨는 “요즘 시끄럽고 그래서” 고인의 친구와 팬들에게 해마다 돌리던 연락을 따로 하지
않았다. 몇 년새 손님이 부쩍 줄어, 양력 1월6일에도 따로 찾는 사람이 많진 않을 듯하다. 영정사진 속 고인은
썰렁한 전당을 둘러보며 사람으로 꽉 메워졌던 학전소극장 시절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퍼그같이 주름웃음을 짓고 인생을 나지막이 읊조리던 가수 김광석. 그는 살아서도 포크의 신화였지만 사후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신화’다. 잊을 만하면 영화에서, 텔레비전에서, 노래방에서 흘러나온다. 문화적·
사회적 감수성이 이질적인 80년대, 90년대, 2000년대를 아우르는 우리들의 ‘공통분모’를 자처한다. 또한
갑작스러웠던 죽음은 ‘불완전성’을 완성시켰고, 그는 박물관에 전시된 화석의 권위를 얻었다. 산울림과
들국화가 시대를 풍미했고, 이문세와 이승철이 애절한 절창을 보여도, 대중문화는 유독 김광석을 자주
찾는다. 사람들이 그의 이름에 유달리 관대해지기 때문일까. 사람들을 노래로 마취시킬 줄 몰랐던 그는
이런 모습이 고마울까, 버거울까.
후배 가수들은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그의 이름을 애써 부른다. 가수 싸이, 이소은, JK김동욱, 김경호의
공통점은 김광석의 노래를 리메이크했다는 사실뿐인지도 모른다. 성시경은 종종 “35살 땐 김광석처럼 소극장
공연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테이는 “김광석의 목소리를 가지고 싶다”고 소망한다. 경력 많은 유리상자도,
신인 그룹 버즈도 입을 모아 “김광석처럼 1천 회 공연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김광석, 그는 가수들에게
‘가창력’과 ‘라이브’의 선언문이다. 드라마, 영화, 뮤지컬에서 그는 청춘과 회한을 상징하는 소도구로 변신한
다. 노래의 리얼리티가 배경음악에 인용되면 애틋함은 고조됐다. 시트콤 <세 친구>(2000), 드라마 <삼총사>
(2002), 영화 <클래식>(2003), 영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2004),
뮤지컬 <달고나>(2005). 매년 어디선가 노래는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무턱대고 감정이입을 했다. 소설가
윤대녕도 시인 이동재도 나지막이 그를 불러 행간에 이름을 새겼다. 그는 ‘표상’이었다. 영화감독 허진호는
맑은 웃음을 띤 김광석의 영정사진을 보고 ‘죽음을 앞둔 사진사가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는다’는 줄거리를
떠올렸고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89)는 그렇게 해서 나왔다. 배경음악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김광석은
누군가들에게 ‘내러티브’의 제공자가 되기 시작했다. ‘김광석 내러티브’는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에 직접적으로 표출되면서 거대한 붐을 일으켰다. 인민군 오경휘 중사(송강호)가 “오마니 생각나는구만.
근데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대니? 야! 야! 광석이를 위해서 딱 한 잔만 하자!”라고 말한 순간, 남북의
병사와 관객들은 다같이 몰래 잔을 부딪쳤다. 1996년이래 가장 뜨거웠던 회고 열풍은 이듬해 2001년 김광석 음반 2장을 발매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이뤄진 추모 움직임들은 점차 사라지고 초기에 거론되던
장학사업도 소식이 없다. 1996년 2월, 49재 때 김광석 추모사업회(회장 김민기)가 첫 추모 공연을 연 뒤
1999년 1월 서울 학전에서 열흘간 포크축제를 개최해 좋은 반응을 얻고, 2001년 1월엔 ‘JSA 효과’에 힘입어
추모 음반 <김광석 앤솔로지 1> 발매 공연을 했지만 이젠 동료가수들이 자신의 콘서트에서 간간이 친구의
노래를 부르는 정도다. 1999년 윤도현, 서우영, 이정열, 엄태환이 한시적으로 결성한 김광석 프로젝트 밴드도
영화 <산책>(2000) O.S.T 작업에 한 차례 참여한 게 눈에 띌 뿐이다. 이에 비해, 1989년부터 16차례 열린
유재하 가요제는 추모제를 겸하면서 조규찬(1회), 유희열(4회) ‘재주소년’ 박경환(14)을 배출했다.
그를 기리는 건 팬들이다. 1995년, 김광석과 어울려 나우누리 통신동호회에서 활동했다가 이후 웹으로
옮긴 팬클럽 ‘둥근소리’(http://www.oneum.net)는 1996년부터 매해 ‘작은 음악회’를 열고 있다.
1995년 회원들의 연습을 지켜본 김광석은 “나도 게스트로 꼭 나갈게”라고 약속하며 “수익금은 소년소녀
가장 돕기에 쓰자”고 제안했지만 갑자기 그들의 곁을 떠났고, 단순했던 동호인 행사는 추모 음악회로 변했다.
동물원, 박학기, 권진원 등 동료 가수들이 잊지 않고 게스트로 참여하는 이 음악회는 2006년 2월에도 열릴
예정이다. “형의 10주기라고 특별한 건 없습니다. 매년 하던 대로 하려고요.” 소리지기 이승우씨나 다른
회원 모두 여전히 그를 “형” “아저씨”라고 부른다.
그의 그림자가 희미해진 이유는 죽음의 원인이 부른 유족 간의 갈등과 저작권 분쟁에서 찾을 수 있다.
김광석씨 부모와 부인 서해순씨는 1996년 죽음 직후 저작권을 놓고 다툼을 하다가 6월 합의에 이른다.
그해 여름 딸 서연(14)이를 데리고 출국한 서해순씨는 미국, 캐나다에 거주하다가 2002년 6월 귀국해
음반기획사 ‘위드33’을 차렸으며, 딸 서연이는 성장장애증후군으로 인해 현재 미국 버지니아에 머물며
학교에 다닌다. 사후 음반들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저작권 분쟁이 일어났고, 2004년 10월8일 아버지
김수영씨가 폐암으로 사망하면서 ‘김수영씨 사후엔 판권을 손녀에게 양도한다’는 1996년 합의 조항이 효력을
보이면서 분쟁은 2라운드로 들어갔다. 분쟁의 씨앗은 1993년 김광석씨가 킹레코드(현 신나라레코드)와
계약할 때 아버지 김수영씨가 대리인이 되어 계약서에 사인을 한 데 있다.
나오지 못한 “아저씨”의 5집이 아쉽다
부친 김수영씨와 둥근소리 회원은 2003년 1월5일 <시사매거진 2580>에서 사인에 의문을 제기했다.
친구 박학기는 이미 1988년 6집 음반 <남겨진 너의 노래(광석에게)>에서 “어디선가 나의 노랠 듣고 있다면
꿈속에서라도 말해줘/ 너 떠나던 밤 가려진 모든 진실을”이라고 말한 바 있다. 1996년 사건 당시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신촌 세브란스병원을 드나들며 사인에 의구심을 품게 됐다는 문화방송 이상호 기자는 2005년
12월22일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다”며 “다만 명예훼손 등의 문제로 자세한
내용을 공개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수사당국이 의지를 가지고 당시 자료를 검토하면 의문점을 찾아낼
것이며, 그 지점에서부터 누가 왜 죽였을까를 재수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건 당시 경찰은 긴급수사반을 편성했고, 부검도 했지만 의문점은 없었다.
2006년 달력을 펼쳐도 팬들이 가공이 덜 된 김광석을 만날 기회는 거의 없을 듯하다.
새로 발굴된 1992년 미 워싱턴대 라이브 실황은 접근성이 낮은 위성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에서 선보인
다. 연초 계획된 뮤지컬 <서른 즈음에>(가제)의 공연도 불투명하다. 다만 “서울 대학로에 노래비를 세우고
싶다”는 둥근소리의 작은 음악회가 유일한 제례가 될 듯하다. 생전에 발매된 음반과 사후에 발견된 미발표곡,
공연 실황 등을 들으며 팬들은 마음을 달래야 할 듯하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 연말 ‘송년회, 이런 노래는
참아주세요’라는 보고서에서 분위기를 ‘다운’시키는 위험한 10곡에 주병선의 <칠갑산>, 조용필의 <한오백년>
등과 함께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 <서른 즈음에>를 포함시켰다. 그만큼 우린 여전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김광석을 노래한다. “변화는 변하지 않는 것이 중심을 잃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더욱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던 김광석. 변하지 않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 우리는 조금씩 변해간다.
나오지 못한 “아저씨”의 5집을 아쉬워하면서.
그가 남긴 노래, 다시 불러요
[김광석의 음악과 생애]
3집으로 ‘포크’ 이정표… <다시 부르기 1·2>는 가요사의 명반
1964년 1월22일 대구시 대봉동에서 3남2녀의 막내로 태어난 김광석이 살아 있다면 올해로 만 41살이다.
그는 서울 경희중학교 현악반, 대광고등학교 합창단, 명지대 경영학과 입학 뒤 가입한 연합동아리 ‘메아리’에
서 차근차근 음악의 기초를 다졌다. 1984년 뮤지컬 <개똥이> 음반에 참여하면서 지인들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을 내고, 1985년 군대에 간 뒤 군에서 사망한 큰형으로 인해 6개월 복무를 끝내고 제대한다.
1987년엔 ‘회색분자’ 친구들이 모여 동물원을 만들어 1집을 내고 의외의 반향을 얻는데, 프로가 되고 싶었던
그는 탈퇴 뒤 1989년 1집을 낸다. 그의 음악적 여로는 생전에 발매된 음반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투박한 강건함, 애달픈 낭만성에 포크의 색깔이 입혀져 음악은 성숙해졌다. 그의 뒤에는 학전의 김민기와
음악감독 조동익이라는 걸출한 두 음악인이 있었다. 1995년 8월 소극장 1천 회 공연을 마친 그는 다음 겨울인
1996년 1월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사후에는 미발표곡과 실황녹음분을 중심으로 베스트
음반이 출시됐고, 동료가수들이 참여한 추모 음반이 나오기도 했다.
△ 1989: 1집(서울음반) 동물원 스타일의 연장으로 <너에게> <내 마음의 문을 열어줘> <기다려줘> 등 수록.
10곡 중 6곡이 자작곡으로 싱어송 라이터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 1991: 2집(문화레코드) 한동준 작사·작곡의 <사랑했지만>이 대히트를 쳤다. 문대현의 <꽃>, 김형석의
<사랑이라는 이유로>, 김창기의 <그날들> 등 다른 작곡가들의 곡이 대부분이며 발라드 느낌이 강하다.
△ 1992: 3집(서울음반) 포크의 색깔이 드러난다. <나의 노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등. 조동익밴드의
담백한 세션이 가미돼 완성도가 높아졌다.
△ 1993: <다시 부르기 1>(킹레코드) 노찾사 시절부터 3집까지의 곡들을 추려낸 베스트 음반. “해석판이
원판을 능가하는 희귀한 예.”(음악평론가 박준흠) <광야에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등.
<이등병의 편지>는 1990년 <겨레의 노래 1>(감독 김민기·제작 한겨레신문사)에서 전인권 버전을 듣고
군에서 죽은 큰형을 떠올린 뒤 여기 수록했다.
△ 1994: 4집(킹레코드) “만족스런 앨범”이라고 자평했다. 마흔에 오토바이로 세계일주를 하고 싶다는 꿈을
녹인 <바람이 불어오는 곳> 외에 <일어나> <서른 즈음에> <자유롭게> 등 수록.
△ 1995: <다시 부르기 2>(킹레코드) 한국 모던 포크의 대표곡들을 ‘김광석’식으로 부른 명반. 한대수의
<바람과 나>, 이정선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양병집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김의철의 <불행아>,
김창기의 <변해가네>, 유준열의 <새장 속의 친구>, 한동헌의 <나의 노래> 등 수록.
△ 1996: <노래 이야기>(삼성뮤직), <인생 이야기>(삼성뮤직) ‘학전’ 공연 중 92~95년과 95년분을 중심으로
담아낸 편집 실황 음반.
△ 1996: <가객 - 김광석이 남기고 간 노래>(문화뮤직) 추모 음반. 김광석, 권진원, 송숙환, 안치환, 노래마을,
류금신, 김영남, 박학기, 김현성, 이정열, 윤도현 등이 김광석의 노래를 부른다. 미발표곡
<부치지 않은 편지 #1, 2> 수록.
△ 1998: <김광석 1+2>(록레코드) 김광석 1·2집과 동물원 시절 노래를 추려서 수록.
△ 2001: <김광석 Anthology 1>(서울음반) 생전의 김광석 목소리에 다른 가수들의 목소리를 덧입힌 색다른
추모 음반. 고 김광석과 가수들이 함께 부르는 것처럼 들린다. 박학기, 권진원, 김건모, 윤종신 등 참여.
△ 2001: <5TH CLASSIC>(서울음반) 김광석의 목소리에 오케스트라 연주를 입혀 웅장한 느낌을 낸다.
△ 2002: <김광석 Live>(스타맥스) DVD 음반. 생전의 KMTV 슈퍼콘서트 실황과 8mm 테이프 공연 실황이
있다. 5.1채널이 아닌 PCM 스테레오.
△ 2002: (EMI) 베스트, 라이브, 미발표곡을 모은 세 장의 CD와 영상이 담긴 한 장의 DVD로 구성된 음반.
음질을 다시 손봤다.
△ 2005: <김광석 Best>(EMI) 최근 출시된 베스트 음반. 3·4집과 <다시 부르기 1·2>에서 대표곡들을 추렸다.
‘멀티’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김광석 사후 발매 음반을 둘러싼 유족 간의 저작권 분쟁
1993년 (주)킹레코드(현 신나라레코드)와 5억원 선지급 계약을 맺을 때, 계약서에 사인을 한 건 김광석이
아니라 아버지 김수영씨였다. 김광석의 부인 서해순씨는 “29살이라 세금 문제가 걸려서였다”고 말하고,
형 김광복씨는 “이혼을 염두에 두고 조치한 것”이라 말한다. 1996년 1월 김광석이 죽은 뒤 신나라레코드가
계약서에 따라 로열티를 아버지에게 지급하기 시작하면서 분쟁이 복잡해졌다. 1996년 4월17일 부인
서해순씨는 (주)킹레코드와 시아버지 김씨를 상대로 저작권사용료 청구권확인소송을 제기했고 양쪽은 6월
합의를 했다. 시아버지가 ‘3집·4집·<다시 부르기 1·2>’에 대한 저작 인접권을 가지고, 부인 쪽은 이후의
라이브 음반에 권리를 행사하기로 했다.
이 합의엔 시아버지 김수영씨가 사망 뒤에 손녀 서연씨에게 권리를 양도한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그 뒤 나온
음반 중 라이브 음반 <노래 이야기>(1996), <인생 이야기>(1996), <김광석 Live>(2002) DVD는 별 문제가
없다. 동물원 시절과 1집, 2집의 노래가 담긴 <김광석 1+2>(1998)도 유족과 무관한 조아무개씨가 판권을
소유하고 있다. <가객 - 김광석이 남기고 간 노래>(1996)는 동료 가수가 임의로 제작했으나 분쟁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2001년에 나온 <김광석 앤솔로지 1> <5TH CLASSIC>과 2002년에 나온 에 대해선 양쪽의
의견이 엇갈린다. 11월2일 서울 중앙지법 형사단독14부(부장판사 김진동)는 서해순씨가 제작한 음반에 대해
김수영씨측이 제기한 저작권 침해를 인정했다. 서씨가 임의로 ‘3집·4집·<다시 부르기 1·2>’에서 노래를 뽑아
썼다는 뜻이다. 서씨는 항소의 뜻을 밝힌 상태다. <김광석 앤솔로지 1> <5TH CLASSIC>은 조금 더 복잡
하다. 서해순씨가 자신이 애초 가지고 있던 ‘멀티(Multi) 테이프’(마스터링하기 전의 원본 상태로 노래 따로,
반주 따로 녹음된 테이프)에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걸린다. 서씨는 한 기획자와 계약을 맺고
멀티 테이프 안의 목소리 음원을 내줬다. 그 음원에 다른 가수들의 목소리와 오케스트라 반주 등이 덧입혀져
두 개의 음반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음반엔 시아버지가 권리를 소유하고 있던 음반에 수록된 곡과 동일한 노래
들이 있었다. 시아버지 측은 소송을 제기했다. 형 김광복씨에 따르면 “서해순씨는 ‘실제 음반에 수록된 목소리
와 다른 트랙을 가져다 썼다’고 주장하면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가수는 보통 한 곡을 여러 번
녹음해 이 중 제일 잘 부른 걸 음반에 수록한다. 법무법인 한결 조광희 변호사는 “작사·작곡자가 가지는
저작권과 달리 ‘가창’이란 연주 형태를 지니는 저작인접권에선 노래할 때마다 제각기 달리 권리를 적용시킬
수 있는 게 사실”이라며 “그러나 1996년 합의사항에서 말한 아버지의 권리는 세부조항이 없는 한 음반에
미수록된 연습용 트랙들도 아우르는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되는 게 타당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2004년 10월8일 김수영씨가 사망하면서 저작권 분쟁은 추가됐다. 1996년 합의 조항에 따라 손녀로 권한을
양도해야 하는데 김광석의 모친과 형은 1996년 합의한 바로 직후 김수영씨가 사후 권리를 자신들에게 양도
한다는 내용을 유서에 담아 공증을 거쳤다며 양도 거부의 뜻을 소송에서 밝혔다. 그러나 12월7일 서울중앙
지법은 서해순씨의 손을 들어줬고, 최근 서해순씨가 3집·4집·<다시 부르기 1·2>에서 히트곡을 모아 발매한
<김광석 Best>는 적법성을 인정받게 됐다. 항소 여부에 대해 형 김광복씨는 “재판 결과를 검토하는 중”이라
고만 답했다.
김 광 석
통키타와 하모니카 하나만으로 청중을 압도했던 김광석.
여전히 80년대를 화두로 삼고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김광석'이란 이름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이른바 386세대의 상처입은 감성이었고, 나즈막한 고백이었다. 지독한 싸움의 언저리에서, 자신을
달래며 혹은 추스리며 들었을 아니 불렀음직한 노래가 바로 고 김광석씨의 노래들이다. 그의 호소력 짙은
보컬은 듣는 이로 하여금 이별의 아픔과 사랑의 상처를 떠올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운동권 출신이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를 노래로 풀어내는 그의 음악적인 역량은 대단한 파급력을 갖고 있었다.
김민기와 한대수의 맥을 잇는 가수로 인정받으며 90년대에 포크음악을 이어간 그는 대학 4학년 시절,
통기타 업소에서 노래를 하다가 1984년 당시 대학가 운동권 노래패인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결성되면서
무대에 서게 되었다. 그는 '노찾사'에서 탈퇴하여, 그룹 '동물원'에서 활동하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거리에서'와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등의 곡으로 그의 감수성과 서정적 아름다움을 과시
하였다. 노래에 깊이를 담고 싶었던 김광석은 멤버 전원이 전업가수로서의 길을 거부하는 '동물원'에서
나와 1989년에 솔로로 데뷔한다.
그는 1집에서 그의 음악성을 보여줄 수 있는 자작곡들을 많이 들려주었지만 그만의 색깔을 내지 못했다는
평을 받으며 그리 주목받지 못하고 2집 '사랑했지만'이라는 곡으로 비로소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되었다.
애절한 발라드곡으로 인기가수가 되기보다 그의 음악영역을 지키고 싶었던 김광석은 '나의 노래', '일어나',
'이등병의 편지', '광야에서',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등 우리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곡들로
90년대를 대표하는 포크가수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항상 대중의 노래를 부르며 대중과 가까이 호흡하고 싶었던 그는 1989년부터 1995년까지 1000여회의 라이브
콘서트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가까운 친구와 이야기하는 듯한 정겨운 말투와 소탈하고 진솔한 무대매너,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인 노래로 때로는 눈물을, 때로는 미소를 자아내며 팬들과 다정다감한 음악적 교감을
이루어 냈다.
그렇게 대중의 편안한 아저씨로 지내던 1996년 어느날, 갑작스런 '김광석 자살'이라는 비보가 전해졌고 이제
그의 노래는 몇장의 남겨진 앨범에서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죽음은 아직까지 의문사로 남겨져 있다.
[출처] 김광석|작성자 산사에서 http://blog.naver.com/namqjo/20044656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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